花華虛虛

花華虛虛

무릎을 꺾고 고개를 숙여 마당에 핀 작은 들꽃을 들여다봅니다. 그저 흰 점으로 만 보였던 작은 꽃이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수줍게 보여줍니다. 현미경적 인 세계. 그곳에 또 하나의 세상이 있었습니다. 섬세한 실선 들이 꽃잎을 수놓고 있네요. 맵시 있게 말려 올라간 꽃잎, 구불구불 여유롭게 뻗어 나온 노란 꽃술도 멋이 있습니다. 공기는 미동도 없는데 여리고 작은 꽃잎이 무엇에 놀랐는지 파르르 춤을 춥니다.

세상의 모든 꽃은 아름답습니다. 저마다 개성이 다를 뿐, 예쁘지 않은 꽃은 없지요. 국화를 사랑한 도연명과 매화 사랑이 유별났던 퇴계가 아니더라도 숱한 선비들이 꽃을 예찬한 시를 남겼고 꽃 그림을 그렸습니다. 퇴계는 아침에 화분의 매화에 물을 주라 하였고 저녁에 조용히 앉은 채로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죽는 순간까지 매화 사랑을 멈추지 않았던 것이지요.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나오는 “무릉도원” 은 복사꽃이 아득히 흘러 넘치는 동양의 유토피아입니다. 그러나 나에게 꽃이 꼭 아름답게 만 느껴지는 것은 아닙니다. 흐드러지게 무리 지어 피어 있는 꽃은 어쩐지 처연한 슬픔이 먼저 느껴집니다. 한 무리 모여서 꼼지락거리며 동작을 맞추고 있는 아이들처럼… 그저 왠지 헛헛한 마음이 듭니다. 또 지나치게 치장해서 애써 요염한 꽃들은 고개를 돌리게 만들지요. 그러나 아름답다는 형용사와 꽃이 한 몸 이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미술에서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것은 금기 사항이 되어버렸습니다. 아름다움은 그저 표피적인 꾸밈새, 쾌락의 도구, 저급한 감수성으로 치부됩니다. “아름답다” 는 단어의 공통적 특성이었던 조화(調和), 우아함, 고상함 같은 의미는 대부분 상실되어버리고 단지 긍정을 뜻하는 모호한 단어가 되어 버렸지요. “아름다운 세상” 이라는 말은 “정의로운 세상” 에 더 가까운 말 입니다. “아름다운 사람” 은 양귀비처럼 예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지요, 이제 꽃이나 여성에게 붙이는 “아름답다” 는 수식어는 같은 말의 좀 더 “고상한” 용법에 의해 주변의 감수성으로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작가가 꽃을 그린다는 것은 의식 없는 작가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게 된 것 이지요. 칸트는 아름다움의 본질이 무목적성이라고 하였습니다. 물론 이거, 그리 맞는 말은 아니겠지요. 미술의 외형은 의미생산의 수단일 뿐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인 시대에 전혀 어울리는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비주얼조차 필요 없는 미술도 도처에 깔려 있습니다. 이제는 전복적인 것, 위반적인 것이 오히려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시대입니다. 칸트의 말 대로 그냥 목적 없이 아름다운 것은 없는 것일까요?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정말 하찮은 것일까요?

 

그런데 이번 전시는 꽃 입니다. 금속판과 조화(造花)로, 또 드로잉으로 가끔 꽃 작품을 만들어 보기는 했지만 이렇게 대놓고 전시장을 꽃으로 채워보기는 처음입니다. 그러나 만들어 놓고 보니 어쩐지… 의미론에 더 방점을 둔 작품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류가 몇 천 년 동안 꽃을 바라보고, 다듬고, 향기를 맡으며 품어왔던 맹목적인 사랑에 비하면 잔머리를 좀 굴렸다고 할까요? 오랫동안 작가입네 하고 살아왔더니 작품을 만드는 매뉴얼이 자연스레 몸에 배인 모양입니다.

몇 년 전에 작품에 쓸 조화를 구하려고 꽃 시장에 갔다가 저는 정말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생환지 조화인지를 구별하기 힘든 기술의 신묘함은 차치하더라도 그 화려한 가짜의 세계는 진짜의 세계를 압도하고 있었습니다. 시뮬라크르의 세상에는 이미테이션이 더 진짜 같다는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제는 살아 숨 쉬는 조화도 개발되지 않겠습니까? 몇 종류 조화를 사 가지고 와 작품에 이용해 보려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러다 점점 접사촬영을 하게 되었는데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위선의 맨 얼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커지면 커질수록 거대한 꽃의 그로테스크한 모습 뒤에 숨겨진 모습은 허무했지요. 그동안 만들었던 작품들을 꺼내 보니 생기 있게 피어난 꽃은 하나도 없습니다. 시들어 빠진 꽃, 말라가는 꽃, 책갈피 사이에 눌린 꽃, 독기를 품은 꽃, 조화, 그리고 진짜를 가짜로 가공한 프리저브드 플라워… 왜 이런 것들만 눈에 띠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전시장 가득 꽃으로 채워질 것이지만 아마도 마음은 허허롭지 않겠습니까?

 

이천십팔년 여름 곤지암

Kwak Nam S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