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反 빛’ 혹은 그림자의 시선
우리는 이 글에서 작가 곽남신의 미술을 논할 것이다. 대상은 1990년대 중반 경부터 2011년 최근까지 전시를 통해 선보인 작품들이 될 것인데, 그가 평면과 입체, 그리기와 판화 기법 등을 혼용하고 단일 작품의 제시와 작품의 공간 연출을 넘나들며 창작활동을 하는 이유로 장르를 특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제까지 작가는 모티프 면에서 ‘그림자’를 주요하게 채택해 왔기 때문에 시각적으로는 꽤 일관된 지향성을 보인다. 또한 그 그림자를 “의미가 함축된 상상적 이미지”(2004년 작가 인터뷰)로 이해하면서, 직접적이고 물질적인 현실의 날것 상태와는 다소 거리를 둔 감각들, 감수성, 정서를 거기 담아 표현해 내고자 한다는 점에서 작업 주제의 지속성 또한 확보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을 존중한다면 우리는 먼저, 곽남신의 미술에서 ‘그림자’라는 모티프를 조형예술의 관점에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나아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상상적 이미지’로서 작품 속 그림자가 지닌/잠재하고 있는 사변을 철학적이고 미학적으로 논하는 일이 가능할 것이다.
평면성을 위한 흔적에서 실재의 표상까지
흐릿한 윤곽을 가진 그것, 검고 부피 및 무게가 없어 부정적인 의미로 빛과 색채와 실체의 정반대편에 있다고 간주되는 그것. 곽남신의 작품을 앞에 두고 사람들이 가장 먼저 보고, 논자들이 가장 비중 있게 언급하는 그것은 바로 ‘그림자’다. 그도 그럴 것이 1979년 이 작가가 한국 미술계의 신예로 주목 받는 계기가 된 그림에서부터, 이후 30여 년이 지난 현재 중견작가로 자기 미술의 자리를 견지하며 내놓는 복합적 형식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곽남신의 거의 모든 작업에는 그림자 이미지가 핵심적으로 등장한다. 그는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단색조 화면에 마치 반투명 창호지에 적요하게 비치는 나무 그림자 같은 형상을 흑연으로 흐리게 그려 넣었다. 또 파리 유학 후인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중반까지 회화와 판화를 중심으로 다양한 실험을 하던 시기에도, 유적지의 흙바닥을 현상시키는 배경 위에 돌 뼛조각 토르소 암각화의 동물 선묘와 유사해 보이는 도상(Icon)을 그림자 이미지로 그리거나 빚었다. 그리고 2000년대 들어서는 사각형의 평평한 표면에 한정되지 않고, 반(半)입체, 입체, 특정 형태의 캔버스(Shaped Canvas), 설치미술 등 여러 공간과 여러 표현 방식을 가로지르고 접목하면서 삶 속의 부박한 면모/순간/분위기를 그림자로 현상하고 있다. 예를 들면 키스 직전의 남녀의 서로 다른 제스처라든가, 멀리 뻗어나가는 남자의 오줌줄기라든가, 빙 둘러 수다 떠는 이들의 집단 실루엣에서 느껴지는 공모의 기운이라든가.
위와 같이 시기로 구분하고 세부 내용에 따라 변화를 가늠했지만, 그간 곽남신이 해 온 작업에서 우리는 원환처럼 그림자라는 특정 모티프를 중심으로 도는 이 작가 특유의 미적 정향을 발견할 수 있다. 이에 대해 평자들은 곽남신이 “그림자 같은 본원적 이미지를 탐색”(양정무)한다고 분석하기도 하고, “어떤 현현(顯現)의 과정을 드러내려”(김원방) 시도한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또 그 작품의 그림자 이미지가 궁극적으로는 의미의 완료가 아니라 개방을 지향한다고 풀이하면서, 그 “개방성이야말로 곽남신의 조형론에서 중추적인 요인”(심상용)이라 정의한 평도 있다. 관점과 내용은 모두 상이하지만, 여기 인용한 이들의 논평은 곽남신의 미술 중 가시적 대상으로서 그림자에 이론적 배경과 의의를 마련해 준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새길 만하다.
한편, 작가는 애초부터 개념적이거나 논리적인 차원에서 그림자를 다루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보다 곽남신은 자신의 경험 조각과 마음의 편린으로부터, 혹은 덧없이 흐르는 일상 중 눈길이 간 소소한 사물과 생활의 에피소드를 통해 느낀 바를 자신만의 조형예술로 증류하고 종합하는 과정에서 그림자라는 구체적 시각 언어를 포착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 그림자가 작가 내부의 정서적이고 경험적인 영역에서 유래했고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선별된 ‘시각 언어’라는 점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앞서 우리가 크게 세 시기로 나눈 곽남신의 미술에서 그림자는 각기 다른 형태와 내용을 띠며, 다양한 실험의 와중에 각각의 조형 방법론 및 매체를 통해 구현되기 때문이다. 그 다름과 이행, 그간 꽤 많은 작품들 속에서 가시화된 그림자의 다양한 세부가 어떻게 가능했겠는가? 그것은 고정된 조형 이념에 따르기보다는 가변적인 순간들, 외부의 존재들이 던지는 일종의 메시지를 작가가 감각적으로 수신해서 거기에 매번 가시적인 형(形)을 주고 질서를 부여했던 덕분에 가능했던 일이다. 요컨대 이런 과정에서 그림자 자체가 때로는 그저 평면적인 속성을 가진 존재의 흔적으로서, 때로는 문명사적 도상의 대리 기표로서, 또 때로는 뻔하고 진부한 우리 생활의 면면들을 제유하는 수사적 장치로서 언어화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즉 곽남신의 작품에 주요한 모티프인 그림자가 미술사적으로 따져서 ‘사람의 그림자 윤곽을 따라 그린’ 회화의 기원(플리니우스의 <<박물지>>)에 젖줄을 대고 있든, 또 미국 모더니즘 회화의 평면성 강령(그린버그의 <모더니스트 회화>)과 한국식 모노크롬 회화의 취향 그 어디에 결부돼 있든 간에, 관건은 그의 작업들이 개별적인 형태와 스토리를 담고 변이해온 점이라고 말이다. 이 점이 중요한 이유는, 반복되지만 곽남신이 작품에서 그리고 찍고 빚고 깎고 배치하고 구성하는 그림자가 이미지 제작의 결과가 아니라 그 제작과 결과를 주도하는 시각 언어라는 점에서 그렇다. 특히 2000년대 들어 곽남신이 선보이고 있는 그림자 작품들은 작품의 외적이고 물리적인 형태와 내부 스토리의 동기화(Synchronize)가 두드러진다. 이는 아마도 작가 자신이 의식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작가 내부에서 질료 및 기법의 조형적 운용과 말하고자 하는 바의 언어적 표현이 일종의 ‘잘 쓰고 잘 장정된 책’처럼 큰 틈 없이 맞물려 돌아간다는 예증일 것이다.
‘모든 것’에서부터 ‘어떤 것도 아닌 것’까지
우리는 좀 전에 곽남신의 근작들에서 형태와 내용이 동시에 진행된다고 했다. 하지만 이 말이 곧 그의 작품들이 모든 감상자에게 똑같은 이야기를 전달하거나, 동일한 상상을 촉발시킨다는 뜻은 아니다. 물론 예컨대 <키스>라는 제목의 작품에서 대부분의 감상자는 제목과 동일한 사태를 눈으로 보고 싶어 하고 그것을 볼 수 있다. 이때 본 것이 그 작품의 내용이자 작가가 말하고자 한 바라는 점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사실 <키스>는 대형 MDF 판재를 두루뭉술한 윤곽선으로 자르고 그 위에 검은색 락커를 칠한 후 그 배면에 푸른색 전구로 조명장치를 한 평면 설치작품으로 얼핏 봐서는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형상인지 알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작품에서 여자의 어깨를 붙들고 막 키스를 하려는 남자와 살짝 몸을 뒤로 뺀 여자의 실루엣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다분히 작품의 제목에 영향 받은 결과다. 따라서 만약 어떤 감상자가 그 작품의 타이틀을 모르는 상태로 <키스>를 봤다면, 그 실루엣은 전혀 다른 이야기로 어필했을 것이다. 애매모호한 윤곽선을 그리고 있는 사방 300cm 크기의 평평하고 검은이미지 덩어리 안에서 무슨 일이, 어떤 이야기들이 펼쳐지고 있는지 그 누구도 세부를 단일하고 규정적인 언어로 정리할 수 없다는 얘기다.
이 대목에서 곽남신의 그림자가 잠재하고 있는, 전체와 세부에 대한 인과론적 해석의 전횡을 넘어설 가능성이 떠오른다. 곧바로 이에 대한 논설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우리 몸에서 전(全) 신체와 각 지체들 간의 위계 짓기 내지는 종속관계에 대한 오래된 담론부터 들어보자.
머리와 손처럼 신체의 가장 중요하고 귀한 부분은 항상 노출된 채 온갖 생활의 대소사를 처리하느라 바쁘다. 반면 남녀 생식기처럼 가장 본능적이고 사람들이 부끄럽게 여기는 부분은 통상 옷으로 감춰지고 은밀히 보호된다. 이는 언뜻 단순한 역설로 들리지만, 지금 바로 우리 몸의 형편만 들여다봐도 바로 인정하게 되는 사실이다. 한편, 이 같은 생각을 별 저항 없이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몸의 부분들을 위계로 나누고 우열을 따지는 것이 아닌가. 말하자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머리, 무엇인가를 만들고 조직하는 손은 생리적 기관인 성기보다 더 상위에 속한다는 논리, 한 몸 안의 지체들을 그저 각각 다른 것으로서가 아니라 차별과 종속의 관계로 구분하는 논리 말이다. 사도 바울은 이 같은 문제를 상호 보상을 통한 평등, 즉 글 첫머리에 썻 듯 신체의 중요한 부분이 헐벗고 수치스러운 부분이 치장된다는 논법으로 해결했다. 그리고 그것이 또한 전지전능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이들이, 즉 할례를 했든 그렇지 않았든, 능력이 있든 없든, 건강한 이든 그렇지 않은 이든 동등한 하나임을 보여주는 증거라며 구원 받을 인류의 보편성을 설파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과 별 가치 없는 것이 눈에 뻔히 보이고, 전체와 그게 속한 부분들이 뚜렷이 구분돼 보이는데 우리가 어떻게 모든 것을 똑같이, 차별 없이 대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 문제는 ‘시각’이다. 즉 이러저러하게 보인다는 것이고, 그 보이는 것에 따라 이러저러하게 일정한 판단 및 해석을 내린다는 것이다. 그럼 이 난제를 시각 이미지로 풀어본다면? 그림자라면 그 차별적이고 단선적인 보기와 사고를 넘어서는 일이 가능하지 않은가? 왜냐하면 그림자란 실재의 반영이지만, 세부로 나뉘지 않는 하나의 존재, 그 내부와 외부가 일치하는 무한히 가볍고 무한히 유연한 형상이기 때문이다.
곽남신이 반드시 이상과 같은 맥락을 고려하면서 그림자 이미지를 다루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는 해도 언젠가 이 작가는 전시 도록에 “그림자는 현실의 형태로부터 얼마든지 자유롭기 때문에 무궁무진한 표현의 폭을 가지고 있고 내부의 모든 3차원적 형상이 오직 외곽선의 형태로만 압축된다”고 썼다. 이 명료한 문장에서 우리가 읽어내야 할 의미는 한편으로 조형적 대상으로서 그림자가 가진 표현 역량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전체와 부분에 대한 현실의 차별적 시선이 작동할 수 없는/작동하기 힘든 지각과 인식의 모델로서 그림자를 사유할 계기다. 어쩌면 전자의 의미에서 그림자의 역량이 앞서 우리가 논했듯 이제까지 곽남신의 미술이 수행하고 거둔 조형적 변화와 성과를 견인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후자의 의미에서 그림자를 경험하고 생각할 여지는 우리 감상자의 몫이다. 거기서 경험적 의미의 폭은, 앞서 인용한 심상용의 평론이 이미 짚었듯이 ‘개방’돼 있다. 그리고 생각의 양은 마치 조금의 두께도 없으면서 실재하는 무수한 것들과 현존하는 다양한 것들을 보증해 주는 그림자처럼(그림자가 없다면 그것은 비존재다) 잴 수 없지만 풍부할 것이다. 그래서 다시 곽남신의 근작들에서 보이는 형태와 스토리의 일치 현상 및 그에 대한 감상자의 인과론적 해석 여부 문제로 돌아가 보면, 비록 그의 작품에서 의미를 지시하는 형상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무궁무진한 표현의 폭’을 지닌 그림자인 한 무궁무진한 해석의 폭 또한 예비한다고 우리는 결론 내릴 수 있다. 그런 차원에서 곽남신의 그림자는 모든 것에서 어떤 것도 아닌 것까지를 품은 보편적이고 개별적인 이미지다.
마지막으로 곽남신의 일련의 작품들 중 회화의 물질적이고 물리적인 측면을 이미지의 내용에 직접적으로 결부시킨 것들에 대해 언급하고 싶다. 예컨대 <소녀>는 부끄러운 듯 그러나 다소 요염하게 몸을 꼬고 선 어떤 여자의 실루엣을, <싸움>은 서로의 몸을 잡아 당기며 싸우고 있는 세 사람의 그림자를 보여 준다. 그런데 실상 감상자가 그 같은 미묘한 정서를, 밀고 당기는 힘을 지각할 수 있는 것은 그런 인물의 묘사 때문이 아니라, 그 그림자 이미지가 그려진 실제 캔버스천이 상하 또는 좌우로 팽팽히 당겨져 있는 덕분이다. 이를테면 소녀의 간지러운 동시에 도발적인 감성은 신체의 특정부위(그러나 그림자로 그려졌기 때문에 단언할 수는 없는)를 향해 잡아끌어 내려진 천의 주름으로부터 온다. 또 몸으로 벌이는 세 인물의 사생결단은 화면 오른쪽에 비끄러매진 천의 팽창에 따라 느껴지는 것이다. 이렇게 보자마자 어떤 사태를 직감하고 서로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의 힘은 어디서 왔을까? 우리는 그 힘이 혹시 세계에 대해서, 대상에 대해서 분할하고 차별 짓는 빛의 시선이 아니라, 그것들에 스며들고 품는 반(反)빛/그림자의 시선에서 오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수 있다.